우리 식물학사에서 최초로 우리말 꽃 이름을 분류학적 바탕으로 정리한 책은 <조선식물향명집, 1937>이란 책이다. 이 책의 사정요지(査定要旨)를 보면 꽃 이름이 어떻게 정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 고유의 꽃 이름은 사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들이다. 그래서 꽃 이름의 유래라는 것도 확정적으로 어떤 것이 아닌 추정이고 설(說)일 뿐인 것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사정요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① 그 식물의 형태학상 특장(特長) ② 그 식물의 세계 공통 학술어인 학명의 의의 ③ 그 식물에 관한 전설, 유래 등 ④ 특수식물에 관하여는 산지, 발견자, 생육 상태 등 ⑤ 그 식물의 색(色, 색깔), 취(臭, 향기), 미(味, 맛) 등.
할미꽃의 전설
일제 시대인 1931년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발간한 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Florence Hedleston Crane)으로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우리나라 순천 지방에 와 선교활동을 한 분이다. 그녀는 영문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들꽃과 꽃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그린 꽃 그림과 곁들여 책으로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꽃 그림 옆에 우리말 꽃 이름을 수집하여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할미꽃은 ‘할머니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수집한 할미꽃 전설은 이렇다.
“할미꽃(Grandmother Flower)의 뿌리는 술(beer)에 넣어 삶아 류마티즘에 사용하고, 잎은 코피에, 말린 씨앗은 강장제로 쓰인다. 옛날 한 할머니에게 세 딸이 있었다. 위의 두 딸은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풍요롭게 살고 있었지만 친정 엄마가 오는 것을 늘 반기지 않았다. 할머니는 슬픈 마음이 들 때마다 높은 산 너머 살고 있는 가난하지만 늘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막내딸 집으로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키 작고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는 지팡이에 기대어 막내딸 집으로 가는 높은 고갯마루를 힘들게 올라가다가 기력이 다해 바위에 걸터 앉은 채로 죽고 말았다. 어스름 저녁에 막내 사위가 어깨에 풀을 잔뜩 메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장모의 주검을 발견하고 산꼭대기에 고이 묻어 드렸다.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슬픈 소식을 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어머니 무덤을 보러 산을 올랐다. 놀랍게도 어머니 무덤에는 작고 꼬부라지게 온통 깨진 심장(heart)처럼 속이 빨간 회색 꽃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서 이 꽃은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할미꽃에 대하여 입으로 들어오던 전설이다. 할미꽃 피어 있는 ‘형태학상 특장(特長)’ 즉, 꽃핀 모양을 보고 지은 꽃 이름인 것이다.
할미꽃이라는 국명
미나리아재비과 여러해살이풀인 할미꽃이라는 꽃 이름은 중국에서 할미꽃에 대한 꽃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 백두옹(白頭翁)과 관련이 있다. 백두옹은 할미꽃의 길고 흰털이 달린 열매 형상을 보고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노인의 산발한 흰머리 같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오키나쿠사(翁草, 옹초)라고 부른다. 마찬가지이다. 백두옹에 대한 한자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고 한다.
우리말 할미꽃은 오래된 이름은 ‘함십가비’, ‘할매십가비’를 거쳐 ‘할미꽃’으로 정착되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할미꽃의 또 다른 꽃 이름으로 주지화(注之花) 또는 주지꽃이라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이 꽃 이름도 할미꽃의 꽃대 형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 꽃 이름은 할머니라는 ‘여성성(女性性)’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우리 꽃 이름에 ’며느리‘란 단어를 쓴 것과 동일하다. 꽃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가 꽃 이름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할미꽃에 대한 근대의 기록과 학명
모리 타메조(森爲三)라는 일본 학자가 지은 <조선식물명휘, 1922>는 책 뒤편에 조선어 꽃 이름 색인을 달아놓고 있는데, ‘할미꽃’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본문에 ‘할미꽃(Halmikot)’이라는 꽃 이름과 더불어 ‘노고초(老姑草)’란 약재명도 함께 올려놓고 있다. <조선식물향명집, 1937>에도 ‘할미꽃(노고초)’로 기록하고 있다.
할미꽃에 대한 학명을 <국가표준식물목록>은 풀사틸라 코레아나(Pulsatilla koreana (Yabe ex Nakai) Nakai ex Mori)로 기록하고 있다. 속명인 풀사틸라(Pulsatilla)는 라틴어 풀사티오(pulsatio)에서 유래하는데, '치다', '두드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할미꽃 꽃 모양에 유추하여 ‘종(鐘)’ 모양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하는 곳이 보인다. 그러나 영미권 사전에서는 ‘from Medieval Latin, from pulsāta beaten (by the wind) - Collins Dictionary’라고 하여 할미꽃이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생태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종소명인 코레아나(koreana)는 쉽게 알아볼 것이다. ‘한국(산)의’라는 뜻이다.
우리 할미꽃 종류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생식물 할미꽃 종류에 대하여 <국가표준식물목록>은 '할미꽃', '가는잎할미꽃', '노랑할미꽃', '산할미꽃', '분홍할미꽃', '동강할미꽃', '긴동강할미꽃' 7종을 올려놓고 있다. 중국에서 할미꽃을 의미하는 백두옹(白頭翁)은 그 땅에서 볼 수 있는 할미꽃, 학명으로는 풀사틸라 키넨시스(Pulsatilla chinensis)이다. 일본에서 할미꽃을 의미하는 오키나쿠사(翁草, 옹초)는 우리 꽃 이름 ‘가는잎할미꽃’에 대한 학명을 쓰고 있다. 풀사틸라 케르누아(Pulsatilla cernua)이다. ‘일본할미꽃’이라는 꽃 이름으로도 불린다. 풀사틸라 케르누아가 서양에서 할미꽃을 지칭하는 학명으로 쓰인다. 우리나라 할미꽃들을 분류학상으로 풀사틸라 케르누아의 변종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어 꽃 이름으로는 Pasque Flower(또는 pasqueflower), Wind Flower, Easter Flower 등이 쓰이고 있다.
할미꽃은 산자락이나 풀밭, 무덤 주변 등 햇빛이 잘 드는 남향지에서 잘 자란다. 무덤에서 잘 자라고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이 할미꽃 전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꽃대 높이는 다 자라면 30~40cm 정도 된다. 꽃받침이 6개로 긴 타원형이며 겉은 백색 털이 밀생한다. 안쪽은 털이 없으며 적자색이다. 동강에 가면 벼랑에서 자라는 주로 연보라색 꽃이 피는 ‘동강할미꽃’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흔히 보는 할미꽃은 꽃이 피는 시기에 꽃이 고개를 숙이는 데 반하여 동강할미꽃은 하늘을 향한다. 지난해의 마른 잎을 치마 두르듯 하고선 꽃이 핀다. 동강할미꽃을 찍는 사람들은 마른 잎을 제거하지 않고 사진을 찍는 생태학적 습관을 전수하고 있다. 동강할미꽃의 식생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자연사랑이 담겨져 있는 바람직한 촬영 습관이다. 따뜻한 봄날이 오면 할미꽃, 동강할미꽃 얼굴을 보러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나.